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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

존경받는 컴퓨터 엔지니어 스티브 워즈니악의 어린시절과 애플1

스티브 워즈니악(68) 

스티브 게리 워즈니악은 미국의 컴퓨터 엔지니어로 스티브 잡스,론 웨인등과 함께 개인용 컴퓨터 개발사중 세계 최초이자 최대의 성공을 거둔 애플의 공동 창업자 중 한 명입니다. 


애플1및 애플2 를 거의 혼자 힘으로 개발을 했는데 많은 컴퓨터 관계자로 부터 존경받고 있다는 점과 뛰어난 기술력 때문에 '워즈의 마법사'라는 별명을 갖고 있으며 국립 기술 혁신 메달과 그레이스 호퍼상 을 수상한바 있습니다.


●어린 시절


스티브 워즈니악은 캘리포니아의 산호세에서 태어났고 아버지인 제리 워즈니악은 록히드의 엔지니어였습니다. 6 살 때 아마추어 무선 면허를 취득했고, 자작 키트로 무선기를 조립했으며 13 살 때는 트랜지스터의 조합으로 만든 컴퓨터(이원 가감 기계)를 출품해 과학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기도 했습니다.


스티브 잡스

1971년 휴렛 팩커드의 여름 인턴쉽에서 일하다가 스티브 잡스를 만났고, 둘은 외모도 성격도 정반대 였지만 곧 의기 투합하게 됩니다.


워즈니악이 만든 블루 박스(캘리포니아 컴퓨터 역사 박물관에 전시)

어느날 워즈니악의 어머니가 건내준 잡지 '에스콰이어'에서 블루 박스라는 프리킹 (phreaking : 공짜로 전화를 걸 수 있도록 전화 시스템을 해킹하는 행위) 장비를 본 워즈와 잡스는 둘이서 스탠포드 대학의 도서관에 잡입해 AT & T 의 기술 자료를 찾아 자신들만의 블루 박스를 만들었습니다.


워즈니악은 이 장치를 버클리 블루라고 이름지었고, 두 사람은 바티칸에 장거리 전화를 걸어 당시 미국무부 장관이었던 헨리 키신저를 사칭하며 교황과 통화를 하고 싶다는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워즈니악은 버클리 블루를 만든것만으로 만족했지만 잡스는 당시 워즈가 다니던 캘리포니아의 버클리 대학 기숙사를 찾아가 1대당 40달러의 제작비가 들어간 버클리 블루를 학생들에게 100~150달러에 팔았습니다.


1973년 대학을 휴학한 워즈니악은 휴렛팩커드에 입사해 계산기를 설계하는 일을 했었고, 당시 게임회사인 아타리를 다니고 있었던 잡스는 게임 '탈주'의 로직을 줄이는 일을 워즈니악에게 의뢰했었는데 회사로 부터 보수 7,000달러를 받은 스티브 잡스는 워즈니악에게 700달러를 받았다고 속이고 그 절반인 350달러만을 워즈니악에게 주어 추후 이를 알게된 워즈니악이 마음에 큰 상처를 입게 됩니다.


애플1


애플1

워즈니악은 1974 년 캘리포니아로 돌아온 잡스와 함께 지역의 컴퓨터 매니아 모임인 '홈브루 컴퓨터 클럽 (컴퓨터를 자체 제작하는 모임)'에 참여하게 됩니다.


1974 년에 인텔이 8080 을 출시했을때 알테어 8800 이라는 컴퓨터 키트가 출시되면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워즈는 8080부터 6800 의 흐름을 이어받은 모스 테크놀로지의 6502가 저렴하면서도 간단한 회로의 컴퓨터가 될 수 있음을 확신하고 1975 년 10 월부터 반 년간에 걸쳐 설계에 들어갑니다.


1976 년 3 월에 첫번째 프로토 기계가 완성되었고, 홈 브루 컴퓨터 클럽에서 시연을 하면서 많은 호평을받은 두 사람은 자신감을 갖게 됩니다. 워즈는 처음 휴렛 팩커드를 찾아가 이 기계를 선보이며 상품화를 제의했지만 거절 당했고, 잡스가 일하던 아타리에 상품화를 제의 했지만 여기에서도 거절 당하자 둘은 자신들의 힘으로 출시하기로 결의를 했습니다.


잡스는 마운틴뷰에 있는 컴퓨터 가게의 주인이었던 폴 테렐에게 기판을 보여주었는데 테럴은 강한 흥미를 갖고 30 일 이내에 50 대를 납품 할 수 있으면 현금으로 대금을 지불 하겠다고 제안합니다.


잡스는 자신의 폭스 바겐 차량을 1,500 달러에 판매, 워즈는 휴렛팩커드의 프로그래밍 계산기를 250 달러에 팔아 100 대분의 부품을 모을 수 있었고, 아타리에서 영업을하고 있던 론 웨인도 주식 10 % 분의 권리를 가지는 것을 조건으로 참여했습니다.  


그들은 회사이름을 애플이라고 지었는데 그 유래는 당시 잡스가 사과 다이어트 (당시의 유행)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합니다. (매킨토시도 사과의 품종임).


잡스가 애플로 하자는 말을 처음 꺼냈을때 워즈는 비틀즈가 소유한 회사 이름도 애플이라서 소송을 당할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우려를 제기 했었는데 이것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1976 년 6 월 애플1 50대를 납품했는데 666.66 달러의 가격이 들었지만, 별로 매출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에 실망 론 웨인 권리를 포기하고 회사를 떠났습니다. 그러나 8 월 이후에는 매출이 호전되었고, 잡스와 워즈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애플1을 만들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