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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와 아버지의 관계 히틀러의 아버지 로이스 어머니 클라라와의 관계는 양호 했지만 가부장적인 아버지 로이스와의 관계는 매우 나빴습니다. 로이스는 일자리를 잃어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았고 농업 사업에 실패한 화풀이로 종종 히틀러에게 채찍 체벌을 내리곤 했습니다. 히틀러 생가로이스는 이후 세관 사무관에 취직을 하게 되는데 문맹인 자신이 그와같은 직업을 갖게된 것에 대해 매우 자랑스러워하며 히틀러도 자라서 세관 세무관이 되길 바랬습니다. 추후 히틀러는 아버지가 억지로 자신을 세관 사무국에 데려갔을때의 일을 아버지와의 대립을 상징하는 사건이었다는 말을 했습니다. 11살의 히틀러(가운데), 초등학교 졸업사진 중등 교육을 받을 때(12살)가 되자 히틀러는 김나지움(대학 예비 과정)을 가고 싶어 했지만 아버지 로이스는 레알 슈레(실업 중등.. 더보기
히틀러의 싹을 자르고 싶어 했던 윈스턴 처칠 윈스턴 처칠(1874년 11월 30일 ~ 1965년 1월 24일) 처칠은 1932 년 여름에 초대 말버러 공작의 옛 전쟁터 순례 여행을 떠났을때 독일 바이에른 뮌헨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시기 독일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제일당이 되었고,그 당수인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는 중이었는데 처칠은 뮌헨에서 나치당 간부였던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을 알게되 히틀러와 회담을 권유 받고 그에 승낙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시온주의(이스라엘 땅에 고향을 재건하려는 유대교)를 지지하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슈텡글에게 "왜 히틀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핍박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것을 알게된 히틀러가 회담을 거부하게 됩니다. 히틀러(1889년.. 더보기
패전직전까지도 각가정에 우유와 신문을 배달한 히틀러.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는 자국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워 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을 썼습니다. 이유인 즉슨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원인이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으로 인해 생활이 고달파진 국민들을 선동해 전쟁에 대한 지지를 잃어버리게 한것에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국민들은 어쩔 수 없이 식량을 배급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일상으로 마시던 커피도 커피콩으로 만든 것이 아닌 다른 곡물로 만든 대용 커피가 지급되었습니다. 게슈타포 본부 건물히틀러는 국민들의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비밀 경찰인 게슈타포의 감시를 통해 반정부,반전쟁적인 활동와 언행을 철처하게 탄압했습니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대패하면서 뮌헨의 대학생들이 주도한 반전 운동이.. 더보기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든 요제프 괴벨스의 대중에 대한 선전,선동 전략 나치당은 많은 신문과 잡지를 발간해서 선거 전술과 국내 통제에 이용했습니다. 당 간부들도 신문과 잡지를 발간했고 중심이 된 신문은 히틀러가 직접 인수 협상에 참여하기도 한 나치(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중앙 기관지 였던 푈 키셔 베오 바흐터( 민족적 관찰자)지 였습니다. 1926년 부터 1930년 까지 독일의 신문이나 잡지는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사들은 발행 및 배달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악화된 상태였고 각 신문사들이 상호로 싸우는가 하면 상대 신문사를 방해하고 폐간 시키기위해 애쓰거나 신문지 상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나치당의 지지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1930년부터 신문의 발행 부수 및 종류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는데 1932년 3월 시점에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