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식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든 요제프 괴벨스의 대중에 대한 선전,선동 전략




나치당은 많은 신문과 잡지를 발간해서 선거 전술과 국내 통제에 이용했습니다. 당 간부들도 신문과 잡지를 발간했고 중심이 된 신문은 히틀러가 직접 인수 협상에 참여하기도 한 나치(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의 중앙 기관지 였던 푈 키셔 베오 바흐터( 민족적 관찰자)지 였습니다.


1926년 부터 1930년 까지 독일의 신문이나 잡지는 충분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신문사들은 발행 및 배달비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재정이 악화된 상태였고 각 신문사들이 상호로 싸우는가 하면 상대 신문사를 방해하고 폐간 시키기위해 애쓰거나 신문지 상에서 서로를 비난하는 경우도 잦았습니다.


나치당의 지지율이 비약적으로 상승한 1930년부터 신문의 발행 부수 및 종류가 크게 증가하기 시작하는데 1932년 3월 시점에서 159개의 나치 정기 간행물이 발간 되었습니다.



나치당의 프로파간디스트(선전원)의 대표자는 요제프 괴벨스 입니다. 괴벨스는 구소련의 공산당인 볼셰비키들로부터 선전,선동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일기에 쓰기도 하는등 정적이었던 공산당의 수법을 이용하고 또 그것을 능가하는 규모로 실시했습니다.




집집마다 방문하는 선전원들의 훈련, 엄청난 양의 선전 포스터 배포와 대립하는 정치인에 대한 맹렬할 정도의 네거티브 캠페인, 라디오를 이용한 정치 방송, 항공기를 이용한 선거 유세, 담벼락을 가득 메우는 포스터등 다른 당의 그것을 능가해 대중에게 강렬한 임팩트를 주는 선전활동을 펼쳤습니다. 또한 엔터테인먼트에 당의 선전을 자연스럽게 결합하는 방식의 광고도 사용했습니다.



선전 지도자였던 괴벨스는 1927년 수도 베를린에서 데어 안 그리프 지를 발간했습니다. 이 신문은 푈 키셔 베오 바흐터와 같은 선전용 신문이었고 다른 신문이나 다른 정당을 아주 큰 활자를 써서 욕하는 방식으로 비난을 했고 공격을 받은 신문이 반론 기사를 쓰면 쓸 수 록 나치의 선전을 해주는 효과를 노려 일부러 중상 모략이나 다름 없는 낚시질을 끊임없이 해댔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테러에 호소하기도 했는데 1930년 2월 23일 나치 당원이었던 호르스트 베셀이 공산당원인 알브레히트 헤라에게 암살되자 괴벨스는 베셀을 순교자로 추대하며 성대한 장례식을 거행해 공산당에 대한 대중의 증오를 부추겨 세웠습니다. 베셀이 작사한 호르스트 베셀의 노래는 가장 유명한 나치당의 노래로 알려져있습니다.



1932년 나치는 78만부의 신문을 발행합니다. 나치당은 정부의 권력을 이용해 언론 통제에 돌입했고 퇴폐예술을 지정하는 등 가치관 통일 정책인 강제 동일화에 나섰습니다. 1933년 3월에는 국민 계몽&선전부가 설치되어 괴벨스가 장관으로 임명 되었습니다. 집권후 1933년에는 나치계 신문의 발행부수는 319만부에 달하게되고 다른 신문이나 잡지도 속속 나치의 통제하에 놓이게 됩니다. 

폐전 직전까지도 각가정에 우유와 신문을 배달한 히틀러  전체주의에 빠진 소련의 공산주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