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식

히틀러의 싹을 자르고 싶어 했던 윈스턴 처칠


윈스턴 처칠(1874년 11월 30일 ~ 1965년 1월 24)

처칠은 1932 년 여름에 초대 말버러 공작의 옛 전쟁터 순례 여행을 떠났을때 독일 바이에른 뮌헨에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그시기 독일에서는 국회의원 선거가 실시되어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제일당이 되었고,그 당수인 아돌프 히틀러가 총리로 임명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었는 중이었는데 처칠은 뮌헨에서 나치당 간부였던 에른스트 한프슈텡글을 알게되 히틀러와 회담을 권유 받고 그에 승낙했습니다.


그러나 처칠은 시온주의(이스라엘 땅에 고향을 재건하려는 유대교)를 지지하는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슈텡글에게 "왜 히틀러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핍박 하느냐?"라는 질문을 던졌고 이것을 알게된 히틀러가 회담을 거부하게 됩니다.


히틀러(1889년 4월 20일 ~ 1945년 4월 30일)

에 처칠은 "이렇게 히틀러는 나와 회견을 할 수 있었던 단 한번의 기회를 놓쳤다. 히틀러가 정권을 잡은 후 몇 차례 회담 제의가 있었지만, 나는 구실을 만들어 거절했다."고 회고하고 있습니다. 반년 후 1933 년 1 월 총리에 임명된 히틀러는 독재 체제를 정비하여 1935 년 3 월에 염원이었던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 군비 제한 조항의 폐기를 선언하고 재무장에 들어갔습니다.


나치당 마크

영국에서는 일반적으로 보수당 정치인들은 나치당에 공감하고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조약 같은 것을 강요 받았다면 그 철폐를 주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나치당과 독일 공산당 이외의 정당이 힘을 잃고 있었던 독일에서는 만약 나치당을 정권에서 끌어내리면 대신 정권을 차지하는 것은 아마도 공산당이었을 것입니다. 


독일 공산당 마크

따라서 히틀러의 재무장 계획을 철저하게 억제하는 것 보다는 어느 정도의 군사력을 회복하는 것을 눈감아 주고 소련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여긴 대독일 융화파가 많았습니다. 보수당 당수 볼드윈과 그 후임 당수가 된 네빌 체임벌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런데 처칠은 이러한 의견에 반대한 독일 강경론자 였습니다. 독일 재군비를 허락한다면 독일은 제정 시대 수준의 군사력을 회복하려 할 것이며, 반소 방파제의 장점보다 대영 제국의 세계 지배 체제를 독일이 위협할 수 있다는 것이 었습니다. 그렇지만 1930 년대 처칠은 정당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있는 처지였기 때문에 보수당 주류와 차별화되는 대 독일 강경론 주장을 펼쳐 정당의 중심으로 복귀하려고 했던 정치적 의도가 깔린 주장이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처칠은 독일의 재무장 요구는 단호히 거부하고 영국은 군비 증강을 실시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한 추후 전쟁에서 해군이 아니라 공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여겨 특히 독일 공군력 증강을 강하게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1936 년 3 월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에 비무장 지대로 정해져 있던 라인란에 독일군을 진주 시켰습니다. 프랑스 정부는 독일과 전쟁을 펼칠지에 대한 판단을 내리기가 어려워 영국 정부와 상의를 했지만 볼드윈 총리 (맥도날드는 1935 년 6 월 퇴임 보수당 당수 볼드윈이 다시 총리가되었다)는 융화 정책에 따라 내버려두어야 한다는 의견을 표명했습니다.


영국 국내의 여론도 '독일 영토에 독일군이 들어간것뿐'이라는 유화적 분위기가 강했습니다. 하지만 처칠은 혼자 분노 "클레망소라면 볼드윈 따위에게 물어보는 일없이 즉시 선전포고를 했을 것이다."라고 말하며 프랑스의 인재 부족을한탄 했습니다.

히틀러와 아버지의 관계

패전 직전까지도 각 가정에 우유를 배달시킨 히틀러

히틀러를 총통으로 만든 괴벨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