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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총격을 받았던 사건을 알아보자


로널드 레이건(1911 년 2 월 6 일 - 2004 년 6 월 5 일)

레이건 대통령 암살 미수 사건(Reagan assassination attempt)은 1981 년 3 월 30 일에 워싱턴 DC 에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총격을 받은 사건을 말합니다.


¶ 조디 포스터의 스토커


존 워녹 힝클리(1955 년 5 월 29 일 -)

텍사스 테크 대학의 학생이었던 존 워녹 힝클리는 1976 년에 개봉된 영화 '택시 드라이버'를 여러차례 보면서 12 세의 매춘부 '아이리스'역을 맡은 조디 포스터에 편집증적인 동경을 품게 됩니다. 


조디 포스터(1962 년 11 월 19 일-)

포스터가 예일 대학에 입학했을 때 힝 클리는 포스터에 접근하기 위하여 코네티컷 주 뉴 헤이븐으로 이사해 포스터의 집의 문 아래에 자작시를 쓴 메모를 끼워넣거나 계속 전화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포스터와 연락 실패한 힝클리는 포스터의 주의를 끌어야 겠다라는 생각으로 여객기를 납치하거나 포스터 앞에서 자살을 하는등의 계획을 세우다가 결국 역사적 인물로 포스터와 동등한 입장이 되기 위해 대통령의 암살을 기획하게 됩니다. 계획 실행을 위해 힝클리는 지미 카터 대통령을 주에서 주로 이동해 가며 추격했으나 테네시 내슈빌에서 중화기 불법 소지 혐의로 체포되고 맙니다.


얼마후 석방되었지만 무일푼이 된 힝클리는 집에 돌아온 후 신경 쇠약이 걸려 심리 치료를 받았으나 좋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후 1981년이 되면서 카터가 선거에서 패배해 새로운 대통령이 된 로널드 레이건을 암살할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 총격


그 후 힝클리는 레이건을 저격하기 위해 3 월 29 일에 워싱턴 DC 를 향해 워싱턴 포스트 지에서 다음날인 30 일 레이건의 일정을 확인했습니다. 힝클리는 레이건이 30 일 오후 워싱턴 DC 힐튼 호텔 컨벤션 센터에서 AFL-CIO 회의의 강연하는 것을 확인하고 이 때 총격하기로 마음 먹었습니다.


총격에 앞서 힝클리는 포스터에게 편지 2 통을 쓴뒤  숙박하고 있던 호텔을 나와 힐튼 호텔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레이건 이외에도 캐나다의 피에르 트뤼도 총리 등이 참석하고 있었기 때문에 장내 경비가 삼엄해 회장 내에서 총격을 포기 회장 밖에서 총격하기로 결정합니다.


오후 2시 30 분 경에 강연을 마친 레이건이 T대로 출구에서 나와 대통령 전용차인 링컨 타운카로 향하고 있을때 경비의 틈을 사이로 힝클리가 리볼버총 (RG14. 22LR)으로 6 발을 발사했습니다.


총알은 전용 차량을 맞고 튕겨져 나와 레이건의 왼쪽 가슴에 명중했고, 제임스 브래디 백악관 대변인과 워싱턴 DC 수도 경찰의 토마스 순경, 비밀 경호원의 티모시 매카시에게도 명중했습니다. 힝클리는 도망치지 않았고 그자리에서 비밀 경호원들과 경찰에 붙잡혔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은 여러대의 TV 카메라에 의해 생중계되며 이후 전세계에 레이건등이 총격을 당하는 장면이 방송되었고 이 장면을 집중 보도한 CNN 은 이후 뉴스 전문 방송사로서의 입지를 굳히게 됩니다.


¶ 총알 적출


총격 직후 레이건은 비밀 경호원들에 의해 대통령 전용 차량에 태워졌고, 총에 맞지 않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차량은 즉시 백악관 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레이건이 피를 토하고 아울러 흉부에 출혈을 있음을 알게된 비밀 경호원들은 인근의 조지 워싱턴 대학 병원으로 급히 차량을 돌렸고 레이건은 그 즉시 응급 수술을 받게 됩니다.


총알은 레이건의 심장을 스쳐 폐 깊숙이 박혀있었고, 상당한 출혈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냉전하에서 " 국가 안전상의 이유"로 (실제로 총격 사건 직후 소련의 잠수함이 미국의 대서양 연안에 집결하는 등의 불온한 움직임을 볼 수 있었다) 레이건의 자세한 건강 상태는 백악관 부대변인에 의해 레이건이 퇴원한 이후 언론에 공개가 되었습니다.


또한 레이건 함께 총격을받은 맥카시와 토마스는 다행히 경상으로 끝났지만, 브래디 백악관 대변인은 머리에 총알을 받았기 때문에 목숨은 건졌지만 회복 불능의 장애를 갖게되었습니다.


¶ 위트 


레이건은 출혈을 동반한 중상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의식이 분명했고 자신의 가슴에서 총알을 제거하는 수술 전에 집도 의사들에 대해 "여러분이 모두 공화당원이라면 좋을 텐데.."라고 농담을 던지는 여유도 보였습니다. 집도 의사는 민주당 원이었지만 "대통령님 오늘 하루 우리는 모두 공화당원입니다"라고 대답해 레이건을 만족시켰다고 합니다.


또한 사건의 소식을 듣고 병원으로 달려온 아내 낸시에게 "여보, 피하는 걸 까먹었지 뭐야(Honey, I forgot to duck)"라고 너스레를 떨었기도 했습니다. 이것은 1926 년의 권투 헤비급 선수권 대회에서 잭 뎀시의 패전 코멘트를 인용한 것입니다.


총격 이후 처음 모습을 드러낸 레이건

레이건의 이런 위트는 사건 후 공개 되었는데 위기시에도 유머를 잊지말라는 지도자의 덕목을 실현한 것으로 많은 이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 후 레이건은 노인 치고는 엄청난 속도로 회복하며 사건으로 부터 약 3 주 후에는 공무에 복귀 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레이건은 공화당 대회에서 연설하는 동안 장식 풍선이 파열되 총격이라는 착각이들 정도의 소리가 들리자 "놈은 다시 실패했다"는 농담으로 청중들을 웃기기도 했습니다.


¶ 재판 


힝클리는 1982 년에 열린 사건에 대한 재판에서 13가지의 혐의로 기소되었지만, 6 월 21 일에 정신 이상을 이유로 무죄가 선고 되었습니다. 변호인단의 정신 의학의 보고서에는 힝클리가 정신 이상인 것으로 되어 있지만, 검찰의 보고서는 힝클리 법률상 건강한 상태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힝클리의 무죄 판결은 대다수 국민들을 경악 시키기에 충분했고 하원 및 많은 국가에서 정신 이상자 범죄에 대한 법률 개정으로 이어지게 됐습니다. 그 결과 3 개의 주에서 변호인을 모두 폐지 했는데 힝클리 사건에 앞서 연방 법원의 재판에서는 사형 재판의 2 % 미만에서 정신 이상의 면죄부가 사용되어 그중 80 %가 패소했었습니다.


이 판결로 힝클리는 워싱턴 DC의 세인트 엘리자베스 병원에서 구속되었고 그 후 힝클리는 부모의 감독하에 1999 년에 퇴원을 허용받아 2000년에 석방이 허가되었지만 추후 클리가 조디 포스터에 관한 자료를 비밀리에 병원에서 가지고 있던 것이 판명나 무효가 되었습니다. 이후 2016년 7월 석방이 최종 결정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