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스트라다무스는 1544년에 마르세이유의 의사인 루이 세르로부터 사사를 받아 의사가 되었고 이듬해에 3명의 죄수들을 진찰한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당시 의사들의 전염병 치료 복장. 노스트라 다무스도 같은 복장을 했을 것으로 추정
그리고 1546년에 같은 남프랑스의 도시인 엑스에 전염병이 유행했을때 치료를 위해 그곳으로 떠나게 됩니다. 노스트라다무스는 의회와 현지 주민들에게 전염병의 근절을 요청하기도 했는데, 엑스의 고문서 보관실에는 1546년 6월에 노스트라 다무스에게 치료활동에 따른 계약금 지불이 기재된 출납원 폴 보난의 장부와 당시의 노스트라다무스의 계약이 남아있다고 합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노스트라다무스는 쥐가 전염병을 일으키는 매개라고 판단하고 즉시 쥐 퇴치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당대의 전통적인 치료법인 사혈(혈액을 외부로 배출 시킴으로서 증상을 개선시키는 치료법.의학적 근거는 없다.)을 부정하고, 도시의 주거 및 거리를 술과 뜨거운 물로 정화했으며, 기독교에서 기피시되고 있었던 화장까지도 지시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노스트라 다무스의 의학 저서'화장품과 잼론'
하지만 이후 노스트라다무스의 의학 저서인 '화장품과 잼론(Traité des fardemens)'을 보면 당시의 의학적 지식을 넘지 못했고 심지어 사혈을 시도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환자의 격리를 비롯한 초보적인 공중 보건에 대한 방안을 가지고 있었던 가능성이 제기되고는 있지만 그것은 당시의 의사들이 일반적으로 행하던 것이었지 노스트라다무스만의 고유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화장품과 잼론은 당시에 이용한 치료제의 처방도 실려있는데 서양 측백나무의 톱밥과 으깬 장미, 정향등을 원료로하는 그 약효가 강하게 의심이되는 재료들을 이용했습니다. 결국 노스트라다무스의 의료활동이 전염병을 진정시키는데 기여를 했는지는 불분명한 것이고 현재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은 당시 의사들도 주저하는 경향이 강했던 전염병 유행 지역에 스스로 치료를 위해 과감히 찾아간 인물이란 점입니다.
또한 노스트라 다무스가 몇번이나 전염병 유행 지역에 부임했지만 전염병에 감염되어 죽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면역 상태에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게 해줍니다.
노스트라 다무스가 말년을 보낸집
노스트라 다무스는 프로방스 지방의 살롱 드 크로에 정착한후 1547년 11월 11일 과부 안느와 재혼을 했습니다. 노스트라 다무스는 일생을 이 도시에서 보냈지만 1년 정도의 여행으로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는데 여행중 한무리의 수도사들을 만나 그중 한명 앞에 경건하게 무릎을 꿇고 그가 미래의 로마 교황될 것이라 예언을 해, 주위의 웃음을 샀지만 실제로 그 수도사인 펠리스 퍼레티는 노스트라 다무스가 사망하고 20년뒤에 후에 교황 식스토5세고 즉위함으로 인해 그의 예언이 맞았다라는 유명한 일화가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가 후세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의견도 존재합니다.감사합니다. 다음시간에는 예언가로서 성공한 노스트라 다무스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