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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모두 실패한 비행을 라이트 형제가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오빌 라이트(왼쪽)와 윌버 라이트

라이트 형제 이전까지 많은 연구자들이 비행에 도전했지만 죄다 실패를 거듭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당시로서는 고도의 과학적 관점을 통해 비행 메커니즘을 해명하고, 동시에 공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꾸준히 자신들의 조종 기술과 기체를 업그레이드 해갔습니다.


버지니아 항공 우주 센터에 있는 라이트 형제의 풍동기구 복제본

풍동(인위적으로 바람을 만드는 시스템) 실험을 통해 얻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여러대의 글라이더 프로토 타입을 만들고 단계적으로 비행기를 개선해 나갔으며 연구 초기에는 비행기에 대해 많은 지식을 갖고 있었던 새뮤얼 랭글리 교수 연구 자료의 제공을 받기도 했습니다.


노스 캐롤라이나 킬데빌 힐스의 모래 언덕에서의 첫 비행 (1903 년 12 월 17 일)

글라이더를 이용한 테스트 횟수도 릴리 엔탈(독일의 초기 항공 공학 발전에 공헌한 항공 선구자 중 한 명)들에 비해 훨씬 많았기 때문에 방대한 양의 실험 데이터를 수집함과 동시에 비행 기술을 익힐 수 있었습니다. 


글라이더를 기초로 먼저 조종을 연구해 스스로 파일럿 기술을 익히고 난 다음 동력을 추가하자는 것이 그들의 전략이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비행 프로젝트는 동력 기체의 제작 밖에 안중에 없었다는 점이 실패의 요인이었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새뮤얼 랭글리

형제의 성공에 앞서 1903 년 10 월 7 일과 12 월 8 일 두차례에 걸쳐 새뮤얼 랭글리 교수의 비행기인 에어로 드롬의 비행 테스트가 있었지만, 그의 기체는 날아 오르자마자 강으로 추락했습니다.


투석기에서 발사?되는 에어로 드롬

미국 정부 지원하에 주도한 실험의 실패는 랭글리 교수에 대한 평가를 땅으로 떨어뜨리기에 충분했습니다. 랭글리 교수의 프로젝트는 먼저 무인 동력 비행기 실험을 실시 후 유인 동력 비행기를 테스트 하는 것이 었기 때문에 파일럿은 '실전'을 강요당하는 셈이었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보다 많은 데이터를 얻기 위해 '안정된 강풍이 불고있는 장소'를 기상청에 문의해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키티호크를 선정했고, 글라이더를 연처럼 공중에 고정하여 안전하고 또 안정적인 실험을 이어나갔습니다.


라이트 형제의 자전거 가게

또한 형제는 자전거 가게를 운영하여 연구에 필요한 자금을 모음과 동시에 자전거 기술을 활용하여 기체를 다듬어갔는데 예를 들어 2 개의 프로펠러는 체인 구동이었고, 반전 토크를 상쇄하기 위해 체인을 한쪽으로 교차하는 등의 기술을 적용했습니다.



한편 그들의 기체는 전방부에 수평 안정판과 승강타가 모두 있는 등 안정성면에서 문제가 있었는데 안정성과 조종 응답을 동시에 구현해내는 것은 당시로서는 너무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라이트 형제는 조종 응답을 최우선으로 한 비행이야 말로 진정한 비행이라는 강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고 그덕분에 형제는 활강 비행을 반복하면서 고도의 조종 기술을 갖게됨으로써 비행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