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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세계 무역과 금융의 중심지였던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의 황금시대에 대해 알아보자.

암스테르담의 성니콜라스 대성당

17 세기는 암스테르담의 황금시대였습니다. 17 세기의 암스테르담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 한 도시였고, 암스테르담 항구는 교역 및 상업 중심지로서의 매력은 얕은 깊이의 항구라는 단점을 보충하고도 남음이 있었습니다


1595 년 암스테르담의 상인들은 코르 하우토만의 선단을 아시아로 파견하여 동방의 물품들을 가득 싣고 돌아오면서 동방 무역 붐이 일어났는데 경쟁이 점점 치열해졌고, 1602 년에는 동방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가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가 설립되게 됩니다 . 


암스테르담 항구의 상선들은 북아메리카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 현재 인도네시아와 브라질까지를 포함한 광대한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의 무역상들은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나 서인도 회사(WIC)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었고 이 회사들은 추후 식민지를 통한 해외 이권의 기초가 되었는데 구체적으로는 중남미 농장에서 생산된 설탕에 대한 권리를 갖고 있었습니다.


암스테르담은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교역 시장이었지만 세계를 견인하는 금융 센터이기도 했습니다. 암스테르담 증권 거래소는 세계 최초의 상설 거래소였고 튤립 파동으로 인한 선물 거래 등이 이루어지고 있기도 했습니다. 


푸딩 세인트 운하

헤렌 운하, 푸딩 세인트 운하, 케이자 운하 같은 운하가 건설되고 암스테르담 운하망이 형태를 갖추어 갔다 것도 이 시대입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언론의 자유와 사상의 자유가 가장 많이 보장되는 나라였고, 종교에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유럽 각국에서 문화인들이 망명을 해, 네덜란드, 특히 최대 도시인 암스테르담에 많이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르네 데카르트(1596년 3월 31일 - 1650년 2월 11일)

암스테르담에는 이 당시에 400개의 출판 업체가 존재했고, 르네 데카르트가 암스테르담에서 활동하고 있는등 암스테르담은 세계 문화의 중심이 되어갔습니다.


암스테르담의 인구 는 1500 년에는 1 만 명을 조금 넘는 정도 였지만, 1570 년에는 3 만 명, 1600 년에는 6 만 명, 1622 년에는 10 만 5,000 명, 1700 년에는 약 20 만명으로 급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