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dF 웨건과 독일 가족(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독일의 항복으로 끝나면서 독일 전역은 연합군의 점령하에 있었습니다. 폭스바겐의 KdF 웨건 자동차 생산 공장은 처음엔 소련에 접수되어 곧 철거될 예정이었지만 철거하기엔 아깝다고 판단한 영국이 공장의 관리권을 따내고 KdF라는 나치스러운 이름을 근처에 있는 성 이름을 따서 볼프스부르크라고 개명합니다.
KdF 웨건
폭스바겐에게 있어 최고의 행운은 영국군 소령 이반 허스트가 공장 관리자가 된것입니다.허스트는 KdF 자동차의 미래와 근로자들의 기술력을 높이 평가하고 리더쉽을 발휘해 전쟁 이후 폐허나 다름없었던 공장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그 결과 1945년에 폭스바겐이 재편되었고 KdF도 '폭스바겐 비틀'이라고 차명을 변경하며 다시 생산에 들어갈 수 있게 됩니다.
또한 허스트는 점령군 입장이면서도 품질 관리와 영업 네트워크, 서비스망 정비등 모든 영역에 걸쳐 폭스바겐의 기초를 닦았고 1947년 부터는 네덜란드를 시작으로 수출까지 하게 됩니다.
폭스바겐 자동차는 전후 미국, 영국의 주요 자동차 메이커들로 부터 연구의 대상이었지만, 그 진보성과 합리성을 보수적인 디트로이트와 영국의 기술자들은 잘 이해를 하지 못했습니다. 영국 제조업체의 조사단들은 폭스바겐 자동차를 "평가할 가치가 없는 자동차"라는 혹평을 했고, 포드 창업자의 아들이자 당시 포드의 CEO 였던 헨리 포드2세는 1948년말 연합국측과의 검토회의에서 "폭스바겐이 가치가 없다고 판단된다"라는 발언을 했는데 다른 관계자들도 이에 동의 했습니다. 이러한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폭스 바겐은 연합국측에 설계나 설비를 압수당하지 않고 독일 민족계 기업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됩니다.
하인리히 노드호프(1899.1.6 - 1968.4.12)
이에 앞서 1948년 1월, 전쟁전 독일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 오펠의 간부였던 하인리히 노드호프가 허스트의 뒤를 이어 폭스바겐의 사장으로 임명되었고 그는 취임사에서 "미래는 과거와 결별할때 시작된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폭스바겐은 '폭스바겐 비틀 타입1'을 중심으로 사업을 발전시켜 나갑니다.
폭스바겐 비틀.타입1(1964년)
주력 모델인 '타입1'은 내구성과 경제성, 그리고 우수한 애프터 서비스 체제로 세계 시장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게됩니다. '비틀(딱정벌레)'라는 애칭으로 널리 사랑받은 이 고풍스러운 유선형의 차량은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에 대량 수출되 귀중한 외화를 벌어들이며 서독의 전후 부흥에 기여했습니다.
2003년 멕시코 공장에서 생산이 종료될 때까지 생산된 총 대수는 2,152만대 였는데 모델 체인지 없이 하나의 차종으로서는 전례가 없는 양산 기록이고 앞으로도 이 기록을 깨는 차량은 나오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이 많습니다.
폭스파겐 타입2
폭스 바겐은 타입1의 설계를 기반으로 한 파생 차종을 많이 출시 했는데 그중 1950년에 발표한 캡오버 원 박스 차인 '타입2'는 화물 및 승객 탑재 능력과 승차감을 양립시킨 우수한 범용 차량으로서 많은 인기를 끌었습니다.
1960년까지 서독 정부의 국영 기업이었지만 이후 민영화 되면서 '폭스바겐 법'이라는 특별한 법률이 제정이되었는데 이법에 따르면 투자자는 아무리 주식을 많이 갖고있더라도 의결권의 20% 이상을 행사할 수 없도록 했으며 최대 주주가 독일의 연방주중 하나인 니더 작센인등 정상적인 일반 기업과는 다른모양을 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