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인슈타인
과학적 업적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아인슈타인은 다양한 정치적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동안에는 평화주의를 내세우며 전쟁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는데 "2%의 인간이 병역의 의무를 거부하면 정부는 전쟁을 계속할 수 없다. 왜냐하면 병역 대상자의 2%를 수용할 수 있는 규모의 감옥이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며 반전 운동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에는 입장을 바꿔 "병역거부는 허용되지 않는다."라는 발언을 해 동시대의 문학자인 로랭 롤랑에게 통렬한 비판을 받기도 했습니다.
유대인인 아인슈타인은 국가 건설 운동인 시오니즘을 지원했는데 이 때문에 나치 독일로부터 박해를 받고 미국으로 망명길을 떠납니다.
일부에선 "아인슈타인이 원자폭탄 이론을 발견했다."라거나 "아인슈타인이 원자 폭탄의 개발자다."라는 오해도 많지만 질량과 에너지의 관계식인 E = mc²는 모든 에너지에 대해 성립하는 공식이며 특별하게 원자력에 관한 공식이 아닙니다. 또한 아인슈타인은 맨해튼 계획(원자폭탄 개발 계획)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지만 실라르드 레오(유대인 물리학자)의 권유로 당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루스벨트에게 실라르드가 보낸 편지(원자폭탄 개발의 계기가 됨)에 서명을 했었습니다.
루즈벨트에게 보내진 편지
●간추린 편지 내용
"가까운 장래에 우라늄 원소가 중요한 에너지 원이 될것으로 예상됩니다.프랑스의 졸리오퀴리 및 미국의 페르미와 실라르드의 연구를 통해 우라늄이 연쇄 핵반응을 일으킬 수 있게될 가능성이 매우 커졌고 연쇄 핵반응이 일어나면 막대한 에너지와 더불어 라듐과 유사한 신종 원소가 대량으로 생성이 됩니다. 이 연구가 폭탄의 제조에 응용된다면 새로운 유형의 매우 강력한 폭탄이 만들어지게 될 것입니다.그 폭탄은 거대해서 비행기에 실을 수는 없겠지만 배로 운송해 폭발 시킨다면 항만 시설등 넓은 지역을 파괴 할 수 있을 것입니다.우라늄의 최대 산지인 벨기에령 콩고등을 포함해서 미국이 우라늄 광석을 확보하는데 각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정부와 물리학자 간에 지속적인 접촉 역시 중요하고 기부를 아끼지 않는 민간인과 접촉해 기금을 설립해야 하며 필요한 장비를 갖고 있는 기업 연구소와의 협력을 통해 개발을 촉진시켜야 합니다. 독일이 우라늄 판매를 중단한 것은 우라늄의 연구가 카를 프리드리히 폰 바이츠 제커를 중십으로 국가단위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편지에는 우라늄의 연쇄반응이 곧 실현되 그것이 강력한 폭탄이 될 수 있음을 지적해 정부의 주의 환기 및 연구지원, 그리고 정부와 물리학자를 중개하는 구조를 만들어줄 것을 호소했으며 마지막으로 나치 독일이 핵 에너지를 개발하고 있음을 지적했습니다. 편지가 보내지고 8개월 후 엔리코 페르미(핵물리학자)와 실라드르는 정부로 부터 재정적 지원을 받게 되었지만 미국 정부가 맨해튼 계획에 따라 본격적인 원자 폭탄 개발에 임하게 되기 까지는 이후3년이 걸렸습니다.
미 국방 연구위원회의 의장이었던 버니바 부시는 아인슈타인에게 맨해튼 프로젝트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지 않았는데 그이유는 아인슈타인이 과거 평화주의와 시온주의의 정치성을 보여 그가 기밀을 지킬 수 없을 거라는 판단 때문이었다고 합니다.아인슈타인은 말년에 이 편지에 서명을 한것을 후회했습니다.
이편지와는 별개로 1945년 3월에 아인슈타인은 실라르드의 요청에 따라 다시 루즈 벨트 대통령에게 두번째 편지에 서명을 했는데 이 편지에는 일본에 대한 원폭 사용의 우려와 그에 따른 전후 핵개발 경쟁에 대한 우려가 표명되어 있었으나 루즈벨트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읽지 못하게 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