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글러스 맥아더 (1880년 1월 26일 - 1964년 4월 5일)
1945년 8월 29일 맥아더는 히로히토 황제를 포함한 일본 정부 기관을 이용해 일본을 통치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이것은 연합국이 독일 정부를 폐지시킨것과는 전혀 다른 조치로 미국의 전적인 통치 아래에 일본 정부가 계속 존립할 수 있도록 한것인데 이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일본인들에게 있어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나 다름 없는 존재였고 이런 천황과 더불어 일본 엘리트들을 이용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하게 일본을 통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 때문이었습니다.
맥아더는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몇몇 군국주의 극단주의자들이 일본을 장악한것이고 친서방 온건파였던 천황은 그들을 막을 힘이 없었다라는 견해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미국의 역사학자인 허버트 P.빅스는 맥아더 장군과 일본 천황과의 관계에 대해 "연합군 사령관이 천황을 이용했지만 황실이 전복 될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천황으로서는 이득을 취한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맥아더 장군과 히로히토 일본 천황
맥아더가 일본 천황과 처음 만나 찍은 사진을 공개하면서 일본 천황은 국민들에게 신적 추앙심을 잃어버릴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전 까지 일본 천황은 크고 인상적으로 보이게 하는 각도로 찍힌 사진만이 공개 되었고 대중들과 항상 거리를 둔 신비감 그자체인 존재였습니다.
맥아더와 찍은 사진을 통해 일본 국민은 처음으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천황을 보게 되었고 풍체가 좋은 맥아더에 비해 볼품없이 키가 작고 외소한 일본 천황의 모습은 일본 국민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황실의 경외감을 손상시킨다는 이유로 이 사진을 즉각 금지조치 시켰지만 천황이 신적인 존재가 아닌 인간이라는 것을 일본 대중에게 각인 시키고 싶어했던 맥아더는 금지령을 취소하고 모든 일본 신문이 인쇄하도록 명령을 내렸습니다.
맥아더는 일본 통치를 위해 천황이 필요했기 때문에 천황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는 모든 공격으로 부터 그를 지켰고, 천황에 대한 그 어떠한 조사나 감찰도 허용하지 않았으며 대신 1945년 10월 자신의 부하들에게 일본에서 혁명이나 공산주의가 일어나지 않도록 일본 점령과 재건에 전력을 다하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1946년 1월 맥아더는 일본 천황이 전쟁 범죄로 기소 될 수 없다는 다음과 같은 보고를 올렸습니다.
"그를 기소하는 것은 의심할 여지 없이 일본 국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 일으킬 것입니다. 그는 일본인을 하나로 묶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만약 그를 죽인다면 일본은 붕괴될 것이고 그로 인해 오랜 기간동안 유지되야할 수백만명의 군대가 필요해질 것입니다."
기소될 위험에 처한 천황을 보호하기 위해 맥아더 장군의 부하였던 보너 펠러스 준장은 천황의 충신인 미츠마사 요나이 제독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했습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본 측 황제가 전적으로 전쟁과 무관하다는 것을 증명할 수만 있다면 좋을 것입니다. 앞으로의 재판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최고의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도조 히데키(최고의 전쟁 원흉으로 평가받는 인물)이 재판에서 모든 책임을 져야합니다. 도조가 이렇게 말하면 좋겠습니다.'전쟁이 시작되기전 제국 회의에서 나는 황제 폐하가 미국과 전쟁을 반대하더라도 이미 전쟁을 추진하기도 결정했다.' "
허드슨 P.빅스는 "일본 천황의 기소를 막으려 도조 장군에게 모든 책임을 지게한 맥아더의 시도는 성공적인 것이었다.하지만 이로인해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이해에 지속적이고 심한 왜곡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고 분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