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인 아돌프 히틀러는 자국 국민들의 생활이 어려워 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을 썼습니다. 이유인 즉슨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패배한 원인이 사회주의자들이 전쟁으로 인해 생활이 고달파진 국민들을 선동해 전쟁에 대한 지지를 잃어버리게 한것에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쟁이 진행됨에 따라 국민들은 어쩔 수 없이 식량을 배급받아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일상으로 마시던 커피도 커피콩으로 만든 것이 아닌 다른 곡물로 만든 대용 커피가 지급되었습니다.
게슈타포 본부 건물
히틀러는 국민들의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도록 비밀 경찰인 게슈타포의 감시를 통해 반정부,반전쟁적인 활동와 언행을 철처하게 탄압했습니다. 스탈린 그라드 전투에서 독일군이 대패하면서 뮌헨의 대학생들이 주도한 반전 운동이 표면화되었는데 그시기 선전 장관인 괴벨스는 그 유명한 총력전 선포 연설을 기점으로 정부의 완전한 통제와 총력전 체제가 이루어졌고, 이러한 체제 아래에서 연합군의 전략적 폭격에 의해 심각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독일의 무기 생산은 정점에 달하게 됩니다.
방공호로 대피중인 베를린 시민들
연합군의 공습은 이미 1940년 부터 시작이 되었는데 1942년에는 독일 쾰른 시가 1,000여 곳에 달아는 대공습을 당했습니다. 1943년에는 낮에는 미군 폭격기가, 밤에는 영국군 폭격기가 독일의 각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폭격을 했습니다. 이때문에 독일 국민들은 집 침대보다 지하실이나 방공호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많았고 1944년 크리스마스때는 "가장 실용적인 선물은 관이다." 라는 블랙유머가 유행하기도 했습니다.
총력전 체제의 확립 이후 오페라 극장, 서커스, 카바레등의 서민들의 오락 장소가 속속 폐쇄되어 갔는데 이러한 상황속에서도 세계를 대표하던 베를린 필하모닉과 빈 필하모니 관현악단등은 1945년 패전 직전까지도 지속적인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나치가 지원했던 바이로이트 축제도 규모가 축소되긴 했지만 1944년 까지 진행이 되었고, 예술의 도시인 드레스덴도 1945년 2월, 무차별적인 폭격을 당해 초토화가 되었습니다.
패전 직전 소련군의 잔인한 보복을 피하기 위해 서부로 피난가는 독일인들이 속출했고, 베를린 공방전투때는 어린이와 노인까지 동원되 소련군과 전투를 벌이기도 했으며 게슈타포와 나치 친위대는 도망가는 시민이나 탈영병을 배신자로 간주 즉결심판에 들어가 처형을 했습니다. 이런 아수라장임 불구하고 히틀러의 국민 생활 수준 유지 엄명에 따라 독일의 각 가정에는 소련군이 침공한 전날까지도 우유배달과 신문 배달이 끊기지 않았다고 합니다.감사합니다. ○희대의 선동가 괴벨스의 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