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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최초의 SF 소설가, 쥘 베른의 인생


쥘 베른(1828.02.08 - 1905.03.24)

쥘베른은 프랑스 서부 페이드라루아르 지방의 낭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루아르 강의 모랫등(강의 한가운데에 상류로 부터 흘러내려온 모래가 쌓여 만들어진 섬)의 하나인 페이드 섬에서 어린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는데 고립된 섬의 환경은 외부 세상에 대한 그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또한 당시 낭트는 무역이 활발해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오가는 항구 도시였고, 낭트를 찾아오는 선원들의 모험이야기도 베른의 모험심과 상상력을 자극시켜 그는 바다의 영웅이 되는 것을 꿈꿨다고 합니다.



아버지 피에르는 변호사였고 매우 논리적인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그의 성격을 보여주는 일화로 집에서 사무실까지 몇걸음이 걸리는지 알고 있거나, 망원경으로 근처 교회의 시계를 보고 정확한 시간에 맞추어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이러한 아버지의 성격은 베른의 작품 등장 인물로서 표현되기도 했습니다.(예:달나라 여행의 임피던스 바비케인)어머니 소피는 선원가정 출신이었고 베른의 말에 따르면 마치 "질풍"과도 같은 상상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쥘 베른은 5남매의 장남으로 형제들 중 특히 베른과 마찬가지로 바다를 동경했던 동생 폴과 사이가 가장 좋았습니다. 폴은 나중에 해군이 되었고 베른은 아버지의 뒤를 잇기 위해 법률 공부를 하러 낭트 리세 학교에 진학합니다. 성적은 보통이었지만 라틴어를 잘했고 수학을 좋아했으며 운동도 잘해 "운동장의 왕"이라는 별명도 갖고 있었습니다.



쥘 베른은 11살때 첫사랑 상대인 사촌 캐롤라인에게 산호 목걸이를 선물해주기 위해 아버지 몰래 인도로 향하는 범선에 선원 견습생으로 승선했지만 도중에 아버지에게 발각당해 "앞으로 여행은 꿈속에서만 해라"라는 말을 들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하지만 이 일화가 사실이 아니라는 의견도 존재합니다.)


1848년 베른은 아버지의 권유로 파리의 법대에 진학합니다. 그곳에서 그는 많은 예술가들과 교류를 할 수 있었는데 이것은 베른의 재능을 엿본 어머니가 파리에 있던 친척들에게 주선을 부탁했기 때문입니다. 


알렉산드르 뒤마

파리에서 충실하게 생활을 했지만 금전적인면에서는 그다지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던중 뜻하지 않게 알렉산드르 뒤마(프랑스의 소설가)로 부터 극작가 제의를 받게되고 1849년 베른이 쓰고 뒤마가 프로듀스한 베른의 처녀작 연극 '부러진 밀짚 모자'가 호평을 받으며 2주간 상영을 하게 됩니다. 또한 이시기에 시와 연극, 희극,오페라등 30여편을 썼고 대부분 극장에서 상영되었습니다.


에드거 앨런포

한편 베른은 자연 과학 논문도 많이 읽었는데 그가 좋아하는 작가 였던 에드거 앨런포의 과학적 사실을 도입해 이야기의 진실성을 갖게하는 기법을 보며 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쥘 베른의 '5주간의 풍선 여행'

친구 펠릭스 나달이 제작한 풍선기구에서 영감을 받아 1863년 집필한 모험 소설 '5주간의 풍선여행'이 많은 인기를 끌며 베른은 인기 작가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후 그는 편집자 쥘 에첼과 계약을 맺고 많은 수의 걸작 SF 소설들을 출간합니다.


1883년 프랑스의 아미앵 시의원에 당선되어 죽을때 까지 재직했고 말년에는 정신병에 걸린 조카가 쏜 총에 다리를 맞게 되는데 이후 비관주의적인 경향이 강해 지게 됐다고 알려졌지만 최근 우연히 발견된 초기 작품 ' 20세기 파리'를 보면 비관주의적인 일면은 처음 부터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백내장으로 인한 시력저하에 시달리면서도 집필을 끊지 않았던 쥘베른은 1905년 3월24일 당뇨병이 악화되면서 아미앵의 롱그빌 거리 44번지 집(현재 쥘베른의 기념관)에서 사망, 마들렌 묘지에 안장됩니다. 롱그빌대로는 나중에 쥘 베른 거리로 개명되었습니다.감사합니다.

20세기 최고의 지성 아인슈타인의 업적